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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낭만경주] 2026년 6월호 "김시습을 찾아서 혼자 나선 여행"

2026년 11월 02일

매달 새로운 테마로 [월간 낭만경주] 여행을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6월 여행은 '매월당 김시습'이었습니다. 마침 <금오신화> 독서모임이 6주간 일정을 마친 상황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한번 김시습에 관심있는 이들이 실제로 경주에서 그의 흔적을 좇아보는 일정을 한번 만들어 보면 좋겠다 싶은 시기였습니다만, 아쉽게도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 않아 공식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혼자라도 용장사지는 한번 다녀오고 싶어서 일요일(06/28)에 산행에 나섰습니다. 코스는 용장골 주차장에서 출발해서 용장사지를 보고, 남산 능선의 임도를 따라 통일전 쪽으로 내려오는 길로 잡았습니다. 총 3시간이 소요되었고, 6.5km 정도가 나왔습니다. 산행의 난이도는 용장골 계곡을 따라 보통 정도(경사도 10도 안팍)의 산행을 하다가, 설잠교를 건너 용장사지까지 깔딱고개(경사도 40도 안팍)를 거치는 정도였습니다. 서너 군데의 용장사 터를 둘러보고, 둥근 좌대 위에 있는 석불좌상과 바위벽의 부처상, 남산에서 가장 멋진 위치에 있는 삼층석탑까지 둘러보고 그 앞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거기가 산의 7-8부쯤 되는 높이라서, 그 후로는 어렵지 않게 걸어서 임도로 나가고, 그 다음으로는 임도를 따라 하산하면 되는 평탄한 코스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와인을 한 병 사와서는 토마토에 치즈를 얹어 운치있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매월당은 계유정난(1453년, 단종1년)을 거쳐 단종의 양위(1455년)와 그 다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70여명이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이때 능지처참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주었던 이였습니다. 곧이어 단종의 죽음(1457년)과 그를 공주 동학사에 모셔 제사를 치르는 데까지 마치고나서 그는 '설잠'이란 법명으로 불교 승려가 되어 전국 유랑을 떠납니다. 그가 관동, 관서, 호남을 거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경주로 들어온 것이 1462년 겨울 무렵이었지요. 이때 남산 용장사에 방을 얻어 기거했다고 알려집니다. 그는 서울로 불려올라가 '묘법연화경' 언해사업에도 참여했고, 종로의 원각사 낙성식에도 불려가는 등 여전히 잊혀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이 시기 그는 번잡한 서울 생활보다는 경주 금오산의 안온한 생활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겨놓습니다.

경주의 유명한 유적을 샅샅이 다니며 그 감상을 시로 남겨놓은 덕분에 우리는 그가 지금은 사라진 황룡사 대불이나, 분황사의 화쟁법사 비문 등을 보고 남긴 소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외 다수의 고적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꽤나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는 경주의 몇몇 선비들과 즐겨 만났는데, 문천 즉 지금의 남천에서 목욕을 하거나, 토함산에 올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고, 백률사의 스님들과는 법회에 참석하거나 같이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추운 한겨울 내내 화로를 끼고 앉아 심심해서 지었다며 <산거집구>로 100수의 시를 남겼고,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로 5편의 이야기를 창작했습니다. 그가 경주에서 지낸 시절은 <유금오록>이란 이름으로 <매월당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선조 시절에 복권되어 왕명으로 그의 시문을 모아서 <매월당집>으로 펴냈는데, 그의 일대기는 율곡 이이가 작성했지요.

경주 남산, 즉 금오산 용장사에서 지내던 그는 '금오산실'이란 암자를 지어 매화를 심고, 차나무를 가꾸고, 책을 사모으고, 글을 쓰며 지냈습니다. 그 금오산실 자리에 훗날 매월당 영당이 조성되었다는데, 이는 지금 감포 기림사로 옮겨져 있습니다. 그가 경주를 떠난 때가 1572년이니, 햇수로는 10년, 서울을 오간 시절을 빼면 7-8년 남짓 경주에 머물렀습니다. 저는 이 시절이 그의 화양연화였다고 봅니다. 경주는 그를 좀 더 깊이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용장골 주차장의 간이 전시물로는 전혀 충분치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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